[새벽 설교 본문]
열왕기상 18장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So Obadiah went to meet Ahab and told him, and Ahab went to meet Elijah.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When he saw Elijah, he said to him, "Is that you, you troubler of Israel?"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I have not made trouble for Israel," Elijah replied. "But you and your fathers family have. You have abandoned the LORDs commands and have followed the Baals.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Now summon the people from all over Israel to meet me on Mount Carmel. And bring the four hundred and fifty prophets of Baal and the four hundred prophets of Asherah, who eat at Jezebels table."
[토요 새벽 설교 정성엽 전도사]
<엘리야와 바알의 대결>
엘리야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엘리야후’라고 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야웨이시다’, 우리식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나의 하나님만이 참 신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알숭배가 북이스라엘 전역을 지배하던 시대에 엘리야는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시대를 거스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엘리야의 인생은 오로지 ‘진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를 나타내기 위한 삶이였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이 외길 인생은 아합이라는 희대의 악한 왕과의 대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어두운 북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깊게 새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3년간의 가뭄을 선언하심으로, 비와 농경의 신 바알과, 풍요의 여신 아세라가 허구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삶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가뭄으로 인해 극심한 궁핍과 고통에 처해 있을 무렵, 드디어 엘리야는, 가짜 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온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아합과 대면하여 온 이스라엘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진짜 신을 가리는 대결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3년만에 엘리야를 만난 아합은 엘리야에게 뜬금없는 비난을 날립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표현밖에는 생각나지 않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아합의 이 표현을 통해 아합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안긴 책임을 인간 엘리야에게 돌립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통해서 가뭄이 일어났다고 믿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아합이,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가뭄을 일으킬만큼 큰 권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경외심이 있었다면 감히 엘리야를 죽이려 하거나 적대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아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뭄을 일으켰다고 주장한 엘리야로 인해서 왕으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난처해졌다는 사실로 엘리야를 비난한 것입니다. 아합은 3년간의 가뭄을 통해서 자신이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의 허망함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바알이나 아세라나 여호와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삶에 실재적 영향을 미치는 실존적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엘리야를 만났을 때 단번에 죽이지 않고 순순히 엘리야의 요청을 따랐던 이유도 엘리야와의 대결이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가뭄이라는 난제를 정치적으로 피해갈 방법을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아합은 자신감 넘치는 포학한 유형이 아닌, 유약하지만 계산적이고 비열한 유형의 사람입니다. 바알이나 아세라 선지자들이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이미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그가 이 대결을 수락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도 바알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숭배의 대상은 바알도 아세라도 아닌 막대한 부를 통해서 왕국의 안전을 책임져주었던 중계무역의 거점 시돈과의 연결고리가 되는 부인 이세벨의 마음이었으며, 그의 관심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자기의 유익에 있었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 25절에는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라고 아합을 평가합니다. 자기 스스로도 믿지 않는 헛된 신들을 백성들에게 내주고 이 우상정책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도모한 아합을, 성경은 악에게 스스로를 판 사람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의 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합에게조차 많은 회심의 기회를 주십니다.
엘리야와의 갈멜산 대결을 하나님과 아합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주신 회심의 기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주의자였던 아합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되는 갈멜산 대결이 이제 시작됩니다.
여기서 잠깐 집고 넘어갈 부분은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850명이라고 나옵니다.
아합 시대보다 600년 정도 후인 중국 한나라 시대에 황궁에서 일하는 궁녀의 숫자가 600명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숫자입니다.
식비는 궁정식이니까 한끼 만원은 될 것이니 하루에 2천500만원, 매년 100억원의 예산입니다.
그것도 밥값만. 가뭄으로 피폐된 북이스라엘 처지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얼마나 우상숭배에 골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이 이렇게 애지중지 길러낸 왕궁직영 바알 전문가 450명이 엘리야 한 사람과 맞서기 위해 갈멜산으로 투입됩니다.
갈멜산에 모인 백성들을 향해 엘리야는 “너희가 언제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이 말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최대의 혜택을 확보하기 위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파싸흐’는 ‘절뚝거리다’ 란 의미로 26절에 ‘뛰놀더라’라고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로, 바알선지자들이 뒤뚱뒤뚱 춤추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을, 바알선지자들이 바알을 열정적으로 숭배하는 모습과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로 표현하면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우상숭배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이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사막에서 인도하여 주신 여호와보다는 농경의 신인 바알과 같은 가나안의 전통적인 신들이 현재의 자신들에게 더 많은 것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렵긴 하지만, 농사의 신의 축복도 얻고 싶고, 풍요의 신의 환심도 사고 싶고... 세 분 신을 함께 잘 모실 방법을 찾아보자...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미개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전근대적 절충이 아합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이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현상에 대해 우리가 쯧쯧쯧 할 처지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사회생활에 관한 인간들의 축적된 노하우를 따르는 것이 지혜라 여기며 타협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인다.” 한번 정도는 누군가에 써보신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원리는 아니죠.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셔서 “너무 깨끗하게 살면 사람이 안 모인다 해서 대충 하다 왔습니다”.
한~ 대 얻어맞겠죠. 그러나 사실 심정적으로 공감도 가는 이런 류의 그럴듯한 세상이치나 세상이 타협하자고 내민 손길을 우린 덥썩 잡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서 투박한 성경의 법칙이 아닌 데일 카네기의 미끈한 인간관계론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한다고 밥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경쟁적으로 열심히 일을 해야지 먹을 것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신과, 직장생활의 신이 서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는 균형이 잡혀 있어야지, 합리적이고 세련된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막의 신으로 축소시켜서 농경의 신 바알의 뒷자리로 밀어내었던 아합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교회 안의 신으로 축소시켜서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 일상의 삶 속에서는 격리시켜버린 오늘날의 우리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공통점이 이어져 있습니다.
바로 합리적인 중용, 효율적인 균형이란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가장된 영적 양다리입니다.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은 이런 혼합주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활동영역을 내 마음대로 지정해버리는, 하나님 앞에서 나눠진 불결한 마음들을 불살라 버리는 전투였습니다.
엘리야는 미리 잡은 송아지를 나무 위에 놓고 각자의 신을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대결 방법을 제안했고 백성들은 이 방법을 옳게 여깁니다.
먼저 바알선지자들은 제단 주위에서 열심히 뛰면서 바알을 부릅니다.
아침이 지나고 정오에 이르도록 그들의 부르짖음은 응답받지 못합니다.
한나절을 기다린 엘리야는 매우 인간적인 상상을 늘어놓으며 바알선지자들을 조롱합니다.
바알이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고, 졸고 있을 수도 있고, 잠깐 나갔을 수도 있고,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바알이 용변을 보러 나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변기에 앉아 있는 바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부르짖어보라는 엘리야의 조롱에 바알의 선지자들은 몸에 칼과 창을 대기 시작합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작두를 타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피가 흐르도록 열심을 내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가뭄으로 굶어죽는 가운데서도 엄청난 자원을 투자해서 키워낸 바알 전문가 450명에게 드디어 실력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들의 모든 것으로 쥐어짜낸 수단과 방법은 다 공허했을 뿐입니다.
고대 가나안 지역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신앙은, 가뭄과 같은 인간의 통제영역을 벗어나는 거대한 재해나, 불가해한 자연현상들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들에게 바알 신앙과 아세라 신앙은, 언뜻 보기에는 바알을 위해 헌신하고, 아세라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지만, 실상 자신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시켜 줄 대상으로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허상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신앙의 대상이 금송아지건, 우상이건, 돈이건, 아니면 다른 인간이나 인간단체이건 간에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는 행위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으나, 자기를 섬기는데 하나님조차 이용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보아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인지를 가를 수 있는 분별은 하나님께서 오늘 엘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어보신 양자택일의 선택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단 하나의 선택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단호한 요구에서 빠져나갈 절충안은 피조세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계산하면서 이도 저도 아니게 뺀질거리고 있는 사람에게 이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계시록 3장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하는 단호한 선택이 없는 자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도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선택의 순간들 앞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혹은 어떤 상황이 ‘너는 하나님을 위할테냐, 너 자신을 위할테냐, 택하라!’고 물어오게 됩니다.
아직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분들도 계실 것이고, 더 깊은 차원의 선택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지금 자신의 마음을 훈련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물어오시는 이 질문에 간절하고 기쁜 마음으로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힘에 부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하나님께 나의 믿음을 더욱 순전하게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제의 선택보다 오늘은 더욱 단호하고 더욱 깨끗한 답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복된 하루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