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설교 본문]
열왕기하 4장
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Elisha returned to Gilgal and there was a famine in that region. While the company of the prophets was meeting with him, he said to his servant, "Put on the large pot and cook some stew for these men."
39.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One of them went out into the fields to gather herbs and found a wild vine. He gathered some of its gourds and filled the fold of his cloak. When he returned, he cut them up into the pot of stew, though no one knew what they were.
40.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그들이 외쳐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죽음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The stew was poured out for the men, but as they began to eat it, they cried out, "O man of God, there is death in the pot!" And they could not eat it.
41.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독이 없어지니라
Elisha said, "Get some flour." He put it into the pot and said, "Serve it to the people to eat." And there was nothing harmful in the pot.
[금요 새벽 설교 정성엽 전도사]
<엘리사의 해독 사건>
엘리야란 이름은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 다시 말해서 ‘여호와만이 유일한 참 신’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하나님은 구원 이시다’ 입니다. 엘리야가 여로보암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꺼져가고 있던 하나님 의식을 되살려내는 사역을 감당한 선지자라고 한다면, 엘리사는 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증거하는 사역을 감당한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이후로 금송아지 숭배와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온갖 잡신들이 난립하여서 사람들을 미혹했던 혼미한 시대를 밝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만이 이 우주에 존재하고 계신 유일한 참 신이란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엘리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들은 치밀하고 개연성 있는 전략이나 묘수들이 아니라 일반적인 자연법칙 체계 자체를 아예 초월해버리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가뭄을 일으키시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시고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바로 올려버리시는 등 이전의 인류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전설같은 이적들을 행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왕국과 온우주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참 신이라는 증거들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엘리야의 뒤를 잇게 된 엘리사는 사역의 시작에 앞서 엘리야에게 부어주신 것의 갑절로 성령의 역사를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산채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의 두 배나 되는 역사가 되려면 도대체 어떤 역사가 일어나야 될지 상상하기도 어려운 지경인데 열왕기하 이장부터 이어지는 엘리사의 사역은 정말로 엘리야 시대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기적의 역사들로만 연결됩니다.
엘리야를 통해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그 규모가 크고 굵직한 영역에 해당하였다고 한다면 엘리사를 통해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그 규모와 영역을 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의 근원이 된 금송아지의 도시 벧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하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징계한 일과 같은 종교적 영역은 물론이거니와, 4개국이 개입된 전쟁의 판세를 뒤집은 군사의 영역, 40여년간을 이어온 오므리 왕조를 닫아버린 정치의 영역, 강대국 아람의 왕을 교체한 외교의 영역, 여리고의 수질을 개선시켜 도시의 농업생산력이 풍성해지도록 만든 경제의 영역과 같은 국가적 규모의 기적뿐이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의 생계를 챙겨주고, 선량한 부부에게 태의 문을 열어주고, 그들의 죽은 아들을 살려내는 것과 같은, 민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길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드높은 하늘에서 크신 일을 행하시지만, 낮고 작은 나의 세세한 아픔과 고통까지 결코 놓치지 않으시고 내가 머물고 있는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나의 작은 아픔 하나하나까지 함께 해주시며 나를 위하여 일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 우주적 사건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미치는 영역은, 저 멀리 있는 하늘나라만이 아니라, 내가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구체적인 일상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의 작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체험하고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마음에 담아 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좀 과장되게 오늘날의 의미로 요약을 한 번 해보면,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구백년 전쯤에 중동에 있었던 어떤 재정이 부실한 신학교의 급식에 직접 관여하여서, 음식의 질과 양을 향상시켜 주셨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스라엘에 다시 기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나오는 열왕기하 8장 1절을 보면 신기한 표현이 나옵니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 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기근을 Call 하셨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난 표현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전혀 재밌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의 기근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자녀와 함께 동반자살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수넴에서 죽은 아이를 살려낸 후 길갈로 돌아올 때쯤 죽음 같은 기근이 닥쳤습니다.
길갈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선지자 수련생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수장이 엘리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무서운 기근의 시간을 보내는 선지자 공동체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기근이 닥치자 선지자 수련생들은 엘리사에게로 모여듭니다.
아마도 엘리사라면 배고픈 자신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엘리사 입장에서 올망졸망한 눈으로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눈앞에 모여 있던 선지자 수련생들이 얼마나 귀여워 보였겠습니까?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한 턱 크게 쏘고 싶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수만의 군대를 먹일 물을 찾아낸 경력도 있고, 여리고 성의 흉작의 근원을 치료한, 아니 바로 몇일 전에 죽은 사람도 살려낸 엘리사라면, 아무리 기근 중이라지만, 최고급 소고기를 구해서 구워줄 법도 한데, 소를 잡으라는 게 아니고 그냥 큰 솥에다 국을 끓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기름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천연야채스튜입니다. 옛날 군에서 먹었던 멀건 된장국이 떠오르는 레시피인데, 그래도 군에서 주었던 국은 양배추 같이 이름이라도 알 수 있는 야채가 들어가기라도 했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사표 스튜에는 족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야채가 들어갑니다.
들에 나갔다가 우연히 캐낸, 도대체 무슨 맛이 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야채인지 채소인지를 그냥 썰어서 국에 넣은 것입니다.
조리 과정을 살펴보면 맛에 대한 기대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데, 거기에 더하여 놀랍게도 독까지 들어있었나 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고기는 고사하고 독국물을 먹이다니.
그래도 이 선지자 수련생들은 참 착합니다.
솥을 엎어버리거나, ‘야 이 사이비야!’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시여, 냄비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참 시적인 표현이지요? 이러고 그냥 엘리사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자신의 지시로 조리한 국물요리가 대실패를 했음에도 엘리사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가루를 가져오라고 지시합니다.
종류를 확인할 수 없는 어떤 가루를 가져오자 엘리사는 그 가루를 솥에다 던집니다. 그러자 솥 안에 해로운 것들이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근데, 누군가 먹어봤으니까 해로운 게 사라졌는지 알 수 있었겠죠?
죽음이 들어 있는 솥 안의 내용물을 다시 먹어보라는 엘리사나, 또 그걸 순순히 먹는 선지자 수련생들이나, 이 공동체는 정말 신뢰가 깊은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기적에 대한 찬사나 감사와 같은 기록 없이 기적의 결과만 담백하게 기술하고 다음 기적사건으로 넘어갑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어떤 사람이 적은 양의 음식을 엘리사에게로 가져 옵니다.
처음 만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성실한 믿음이 담겨있는, 적지만 값진 음식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사환에게 이 음식을 온 무리와 나눠먹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환이라고 불리는 분은 앞으로도 자주 등장하는 게하시라는 분인데, 엘리사 곁을 따라다니면서 온갖 이적을 함께 경험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수많은 이적들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믿음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불쌍한 분입니다. 앞으로 나올 게하시의 여러 모습들을 주의 깊게 살피시면서, 내 안에 있는 게하시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물리쳐 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턱도 없이 적은 음식으로 1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자 스승이 망신을 당할 것을 우려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민망한 처지에 놓이는 게 싫어서였는지 게하시는 “뭐라구요? 저보고 고작 이 음식을 백명 앞에 내놓으라구요?” 라면서 반문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고 오히려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따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나누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많은 사람들이 먹고 남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도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감격이나 어떤 반응에 대한 언급 없이, 그저 일어난 기적의 결과만 담백하게 기록하고 또 다음 장의 기적으로 넘어갑니다.
두 번의, 어떻게 보면 소소하지만, 생명과 직결되는 음식을 주제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이, 연속적으로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기적이 일상과 같은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먹을 것을 찾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사람부터 찾는 공동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는 비록 비상식적인 지시일지라도 순진하게 순종하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 위로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주십니다.
비록 혹독한 기근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부터 찾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공동체 가운데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스며들어옵니다.
밥을 짓고, 상을 차리고, 식사를 하는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엘리사의 선지자 공동체가, 이 시대에 일어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모든 성도가 삐까번쩍하게 사는 그런 교회일까요?
고등부 학생들이 모두 명문대에 들어가는 교회일까요?
암이나 성인병 걸리는 성도가 한 명도 없는 교회일까요?
오늘 살펴본 이 소박한 공동체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까지 보인 엘리사지만, 자신을 따르는 배고픈 선지자 수련생들을 위해 기름진 값비싼 요리를 주지 않습니다.
이 기근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라면, 이 척박한 환경도 하나님께서 Call하신 것이라면, 기근의 시대를 존중합니다. 척박한 환경을 수용하여 어울려 살기로 자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오신 환경에 맞춰서 소박한 음식으로 시대의 고통을 함께 합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으며 비극의 시대와 동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고 나눕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음식이지만, 그 음식을 나누는 일상적인 과정 모두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일상 속에서 체험하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매끼니 밥그릇과 국그릇에 담겨있는 어마무시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시라, 오늘 우리는 혹독한 기근의 현장에서도 엘리사라는 이름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누리고 사는 소박하고 풋풋한 인생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굶어서 죽고 절망으로 죽어가는 혹독한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국냄비에 담고 보리빵에 담아내는 공동체의 이야기입니다.
그 공동체는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생명을 이어가게 됩니다.
다음 생의 완전한 구원을 예표하는, 현생에서의 소박한 구원의 체험을 일상적으로 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공동체가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일상 속에 담고 사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작은 순간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체험되어지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