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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된 사마리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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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도톨 2020. 2. 28. 06:06

본문

[새벽설교 본문]

열왕기하 6장

24.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Some time later, Ben-Hadad king of Aram mobilized his entire army and marched up and laid siege to Samaria.
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There was a great famine in the city; the siege lasted so long that a donkeys head sold for eighty shekels of silver, and a quarter of a cab of seed pods for five shekels.
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As the king of Israel was passing by on the wall, a woman cried to him, "Help me, my lord the king!"
27.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The king replied, "If the LORD does not help you, where can I get help for you? From the threshing floor? From the winepress?"

[금요 새벽설교 정성엽 전도사]

<포위당한 사마리아성>

스마트폰 시대를 연 故스티브잡스는 교회학교에 출석하던 크리스챤 소년이었습니다.
비록 반항적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명민했던 그는 목사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만약 제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면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이 시간 이 때에 제가 손가락 하나를 이렇게 들어 올릴 것을 아시고 계셨나요?”
그때 목사님이 “그렇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단다.”
그러자 스티브잡스는 또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는 라이프지에 나와 있는 아프리카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비참한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목사님, 그러면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이 아이들의 미래에 일어날 이 일들도 아시고 계셨겠네요?” 그러자 목사님은 “네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하나님도 그것을 알고 계신단다.” 13살이었던 스티브잡스는 그 후로 신앙을 포기합니다.

인생에는 비참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린 스티브잡스가 품었던 이 의문은 우리에게도 일어나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 펼쳐진 한편의 지옥도를 살펴보는 우리 마음속으로도 ‘아니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처참한 광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돌려가며 잡아먹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지옥이 아니고선 상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스티브잡스가 만약 이 본문을 읽어봤다면 굳이 라이프지에 나온 아이들의 사진을 꺼낼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자녀나 손주가 스티브잡스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들은 뭐라고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스티브잡스의 질문에 대한 그 목사님의 답은 스티브잡스의 영혼에 구원의 길을 제시할 정도로 충분한 힘을 담아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피며 얻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인생의 비극들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를 해석해 낼지에 관한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우리가 마주친 비극을, 하나님을 주체로 하여 재구성해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열왕기서는 약속의 자손 이스라엘이 끝내 바벨론에게 비참하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가 다루고 있는 400년의 시간 안에는, 인간의 불순종과, 그럼에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기록들이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안에는 사마리아 성의 비극이 왜 일어난 것인지 따로 나오지 않지만, 열왕기상 20장 42절에 비극의 원인은 이미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왕 여호람의 부친 아합은,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작정하셨던 아람왕 벤하닷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대국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람군 13만명을 전멸시키고, 아람왕 벤하닷까지 멸할 수 있는 기회를 아합에게 주셨는데, 하나님의 뜻엔 관심이 없었던 아합은 자신의 호방함, 또는 자신의 관용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벤하닷을 살려줍니다. 그 결과로 아람은 다시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3년 뒤, 아합 자신도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의 아들 여호람도, 벤하닷이 이끄는 아람군대에게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당해, 백성들이 자신의 자녀를 잡아먹는 참혹한 지경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이 비극의 원인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아합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을 들여다보는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참혹한 일을 허락하셨을까?’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좀 더 훈훈하게 징계하실 방법은 없었을까?
다 떠나서 아합이 잘못했는데 얘는 무슨 죄라고 엄마에게 잡아먹히게까지 하셨을까?
소년 스티브잡스의 마음에 일었던 의문은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환경을 허락하셨을까? 이 질문은 일단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좋은 질문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괜찮아 보이는 질문에 왜 하나님께서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셨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질문의 내용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마음자세로는, 하나님께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한 대속을 펼쳐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믿음 말고는 우리 인간이, 초월적인 하나님과, 또 그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영의 세계와 소통할 수단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우리는 일단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선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가장 가까이 계신 분이시고, 내 모든 곤궁한 상황에서도, 나를 건져주실 능력이 충분한 분이심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먼저 전제가 된 이후에야, 다른 차원의 이해와 해석이 위로부터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균형 잡힌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 않고, 균형이 깨져 있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비극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인 긍휼을 살펴보겠습니다. 나사로 일화의 한 장면이 좋은 예시가 될 것 같은데요, 요한복음 11장 33~35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장면 직후에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을 여시고 죽은 나사로를 바로 살려내십니다.
울고 있는 자들은, 이제 잠시 후면 죽은자의 부활을 목격하게 될 역사적인 행운아들이고, 그들의 눈물은 곧 말라서 환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비통해 하시며 눈물까지 흘리시다니. 이 마음은 뭘까?
이 마음이 긍휼입니다. 지극한 체휼입니다. 죽은자의 부활이라는 큰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역사적 현장에 앞에서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작은 한 사람, 소자 한 명의 마음가운데 일어나는 고통, 비록 아주 잠시 스쳐지나가는 고통일지라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 통증의 깊이까지 내려가 함께 경험해 주십니다.
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아파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절대 신뢰하고 믿음으로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할 하나님의 근본 마음이고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입니다.

그러나 긍휼만큼이나 중요한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 있는데, 바로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 하나님 외의 것이 주인이 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 죄는, 그 어떤 가벼운 해결책도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살벌한 개념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죄의 결과는 반드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참상은, 죄가 종국에 야기할 결과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아마도 백보좌 심판 후에, 죄인들이 마땅히 가야할 곳, 지옥의 일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죄는 좋게 좋게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가벼운 개념이 아닙니다.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하고, 그 댓가는, 피가 철철 흐르고, 생명이 걸려있는 무서운 것입니다.
또한 단 한 사람이 지은 죄로, 인류 전체가 감염되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창조주와 인류의 역사 사이의 거대한 관계 가운데 이해되어야 할 개념입니다.
이 죄는 창조주의 마음을 찢어버리고 창조주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여야만 비로소 속량의 길을 얻을 수 있는 무겁고도 무거운 댓가가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공정한 댓가를 치르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죄에 속해 있는 이상, 우리의 어떠한 비극도 당연한 수순입니다.

이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도 끔찍한 이 광경이, 긍휼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자녀를 잡아먹는 엄마의 마음까지 똑같이 체휼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셨겠습니까?
곧 살려내실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과도 함께하여 눈물을 흘리시는 우리 하나님이실진데, 사마리아의 이 비극의 순간에는,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았겠습니까?
대체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죄와는 결단코 타협하실 수 없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를 얻게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기록을 남겨서, 읽게 하여, 후대의 우리들까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이 아픔의 현장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비극 이면에는 우리 마음으로는 도무지 담을 수없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역설을 우리 모두가 깨닫고 체험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만, 또한 자비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심판의 현장에는 언제나 예비 된 하나님의 구원 또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할 때,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겸비하여야 하지만, 이 때 사탄이 넣어주는 대로 생각하여 육신이 이끄는 두려움에 잠식되게 되면, 우리는 영으로만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나의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멸망의 자리에 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 모든 멸망의 그늘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이 믿음이 작동할 때 우리는 사망의 캄캄한 골짜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미리 발견하여 누리고, 두려움이 이끄는 멸망의 길에서 발길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의 구원을 우리의 다음대에 전수해야할 임무를 부여받고 이 땅에 파견된 하나님의 사자들입니다. 스티브잡스와 같은 보석같은 재능을 가진 소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해줘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신이 먼저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잔뜩 체험해야 합니다. ‘성경을 들여다본다고, 기도만 한다고 쌀이 나오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지’ 이런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기도하면 쌀이 나오게 됩니다.
쌀이 나올 길을 깨닫게 해주시던지, 쌀을 얻을 수 있는 노력을 할 열정이 생겨나던지, 아니면 쌀을 잔뜩 가지고 있는 착한 사람을 붙여주시던지,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의 창을 열어 쌀가마니를 던져주시기라도 하실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지렛대 삼아 우리는,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영의 영역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이 믿음의 살아있는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이겠습니까?
우리의 후대가 우리의 믿음의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그 길을 걷기로 헌신하게 된다면, 이 보다 복된 삶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가 다시 창조주의 스케일에 참여하여, 새창조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삶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큰 꿈을, 오늘 이 시간 꾸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의 참혹한 현장 이면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을 묵상하면서,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는 이때에도, 언제나처럼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이 있음을 마음으로 먼저 확신하고, 그 구원을 미리 찾아내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