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5일 주일설교요약
하나님, 우리 아빠
(갈라디아서 4장4-7절)
419장(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은 신분이나 소유 등 배경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있는 회당에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고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예수님이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멸시하였습니다(마13:54-55).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요1:45-46)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입니다. 아버지가 어떤 신분과 직업의 사람인지, 출신 지역이 어디인가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와 규정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의 과거 전통사회도 그랬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볼 자격도 기회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신분이 다른 집안의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어떤 측면에서는 과거 예수님 당시나 전통사회 시대에 비교하여 신분적 차별이 더 심화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문과 문벌을 따집니다. 성골, 진골을 말하기도 합니다. 학벌에 대한 중시도 막강합니다. 학벌 안에서도 어느 학교 출신인가가 중요합니다. 어느 직장을 다니는지, 급여는 얼마를 받는지 등이 그 사람의 가치와 역량을 나타내는 지표처럼 작용합니다. 이런 사회 안에서는 서로가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고 자존감을 지키기 힘들게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구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모든 공동체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고, 세상의 미련한 자들이요 약한 자들이요 천한 자들이요 멸시 받는 자들과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신음하던 나라였기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존재감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초대 교회는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박해를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 있는 미천한 사람들의 집단이 초대교회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회적 실상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 시대의 세상 기준에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있는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이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30절).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아빠,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자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확신한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은 나를 속량하셨습니다
2 성령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3 나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릅니다
4 나는 더 이상 (사탄과 세상과 육신의) 노예가 아닙니다
5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험난한 세월을 이겨낸 근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로마서8장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건들 수 없고 해코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이나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35-39절).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 하나님은 자녀인 나를 끝까지 사랑하고 지켜주신다는 체험과 확신이 모든 고난과 시련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지난 긴 세월동안 우리가 교회의 아픔과 모진 시련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이 나눈 대화가 우스갯말로 회자된 기억이 납니다. 환자1: 나는 나폴레옹이다! 환자2: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환자1: 하나님이 내가 나폴레옹이라고 말해 줬어 환자3: 야! 내가 언제 너를 나폴레옹이라고 했어! 자신을 나폴레옹이라 한 사람이나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사람이나 모두 제정신이 아니지요. 이 이야기의 포인트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소위 미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모두 환자들입니다. 실성(失性)한 사람이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나폴레옹’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누군지 알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님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빠이고,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 확신으로 사는 사람은 영으로 성장하고 사탄의 모든 공격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