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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엘리사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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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도톨 2020. 3. 23. 06:17

본문

[새벽설교 본문]

열왕기하 13장

20.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Elisha died and was buried. Now Moabite raiders used to enter the country every spring.
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Once while some Israelites were burying a man, suddenly they saw a band of raiders; so they threw the mans body into Elishas tomb. When the body touched Elishas bones, the man came to life and stood up on his feet.
22.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Hazael king of Aram oppressed Israel throughout the reign of Jehoahaz.
2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But the LORD was gracious to them and had compassion and showed concern for them because of his covenant with Abraham, Isaac and Jacob. To this day he has been unwilling to destroy them or banish them from his presence.
24. 아람의 왕 하사엘이 죽고 그의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Hazael king of Aram died, and Ben-Hadad his son succeeded him as king.
25.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Then Jehoash son of Jehoahaz recaptured from Ben-Hadad son of Hazael the towns he had taken in battle from his father Jehoahaz. Three times Jehoash defeated him, and so he recovered the Israelite towns.

[월요 새벽설교 정성엽 전도사]

<죽은 엘리사의 뼈>

오늘날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으로 볼 때 성경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들과,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나 그런 요소들이 다분합니다.
“죽은 사람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 살아났다.”
“이게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만약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 해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사로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리신 것도 아니고, 불쌍한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것처럼 마음 훈훈한 일화도 아니고...”
“혹시 후대의 누군가가 엘리사를 신성시하기 위해서 민간에 떠돌던 구전 같은 것을 삽입한 것은 아닐까?”
“성경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맥락도 없는 뼈다귀라니....”
이런 저런 의심이 올라올 수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개연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 본문 말씀 역시, 성경 말씀을 굳게 신뢰하는, 믿음의 눈으로 살피게 되면, 모든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듬뿍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현장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배경을 살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지, 어느덧 13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강력했던 오므리 왕조가, 예후의 피의 숙청으로 붕괴되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집니다.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아합왕가를 향한 심판을 성취한 예후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아합보다 크게 나을 게 없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길에 서지 못했던 예후의 모든 업적은, 이전 왕조의 수뇌부들을 모두 칼로 제거하는 공포정치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남유다와 사돈관계였던 아합의 집안을 멸망시킨 예후왕조가 들어섬에 따라 아합과 여호사밧 이후로 계속되었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밀월관계도 끝이 나게되고, 다시 서로를 향해 창칼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토마저 잘라내기 시작하셨습니다.

북쪽의 대제국 앗수르가 동쪽의 바벨론 제국과의 대치로 인해 잠시 가나안 지역에 대한 침공을 멈추게 되면서, 앗수르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숨을 고르고 힘을 키울 수 있게 된 아람왕국이 이스라엘 전역을 침략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12장에 보면 아람 왕 하사엘이 블레셋 가드를 쳐서 점령하였다고 합니다. 아람이 블레셋으로 침공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영토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아람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영토 내에서 버젓이 행군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의 속국이나 진배없었다는 비참했던 현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앗수르왕 살만에셀 3세의 비문에는 아합왕 당시에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동원한 병력은 병거 2천대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열왕기하 13장 7절에는 아람이 이스라엘에 병거를 단 10대만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엘리사가 죽을 당시의 이스라엘은 훅 불면 꺼질 것 같은 촛불같은 신세에 처해있었던 것입니다.

국가 내부적으로도 엄청난 살육으로 왕조를 연 예후의 공포정치로 인해 위축된 분위기가 심각하였을 것이며, 국가 외부적으로도, 남으로는 적대국으로 돌아선 남유다왕국이, 북으로는 국력을 회복한 거대한 아람이,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동편으로부터도 모압의 도적떼가 창궐하는 사면초가의 신세가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험난한 때에, 지난 50년간 숱한 위기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왔던 엘리사마저 죽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대를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소망을 둘 곳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다시 구원의 불을 지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은, 큰 슬픔을 당한, 이름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적을 통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절망의 시대에 가족을 잃고 장례를 치르고 있던 사람들이, 모압 도적 떼를 만나 가족의 시신조차 제대로 안장하지 못하는 그런 비참한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절망의 시대 가운데도 철저하게 비참한 일을 당했던 힘없는 백성들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비통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족의 시신을 눈앞에 보이는 무덤 안에 급하게 던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합니다. 이들이 만난 구원은 죽은 엘리사의 뼈가 묻혀있던 무덤이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라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는 데 그의 모든 인생을 쓰임 받았습니다.
이제 이 엘리사는 그의 시신마저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죽은 엘리사의 뼈에 무슨 권능이 있겠습니까? 그분이 생전에 발휘했던 엄청난 능력이 뼈에 남아있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기사를 읽으면서 엘리사의 뼈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성자의 유골들을 수집하던 옛 가톨릭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본문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하나님, 곧 하나님의 의도를 중심으로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연의 순리를 깨뜨리시면서까지, 이런 일을 일으키셨을까?
차라리 엘리사를 조금 더 오래 살려두셔서, 살아있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셨으면, 좀 더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분의 뜻하신 대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엘리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으로, 다른 어떤 소망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시간 한가운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아가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수호자는 엘리사가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백성들이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 놓여있을 때에라도 능히 건져낼 수 있는 너희의 구원자는 오직 여호와이시다,
생명이 말라버린 엘리사의 뼈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실 수 있는, 참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을 살아가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들의 소망의 최후 보루였던 엘리사의 죽음을 상징하는 그의 뼈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을 가장 첨예하게 나타내셨습니다. 나만이 너희를 구원할 여호와 하나님이다.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예후 이후로 40여년간 망국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던 북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기사회생합니다. 엘리사의 임종 예언이 성취되어서 고작 10대의 병거를 가지고 있던 북이스라엘은, 수천의 병거와 수만의 군사를 보유한 아람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을 넘어서 오히려 아람의 영토를 침략하여 빼앗겼던 옛 성읍들을 되찾아 오게 됩니다. 또한 적대국으로 돌아선 남유다의 도전도 철저하게 응징하여, 예루살렘 성벽까지 허물어 버립니다.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 때는, 아람의 수도 다메섹과 동편 모압과 에돔의 사막지대까지 복속시켜,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역을 통치하는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이 마지막 부흥의 이유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향후 50년간 펼쳐지는 북이스라엘의 전성기의 동력을, 당대의 국제정세나 요아스 왕과 그의 아들 여로보암 2세의 뛰어난 전략이나 치밀한 국가경영과 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원인들로 설명해내는 것이 편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 전성기의 원인을 허무할 정도로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우리 인간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현상들과 사건들을 설명해내는 인과법칙들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과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과법칙 중 하나를 알려주는 보물지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인과법칙은,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온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만 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셨던 언약은, 이미 그들의 끊임없는 불순종으로 파기되었어도 진즉에 파기 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구원과 그들이 누린 전성기는, 그들의 순종이나 믿음에 대한 상급 같은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여겨주시기만 한다면 고작 병거 10대로 시작한 왕조라 할지라도 수천의 병거를 거느린 왕국들을 거침없이 쳐부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마음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마음의 소망이 되는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소망도 품지 못하는 절망에 처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 마음을 베풀어 주셨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소망들이 있습니까? 혹시 넉넉한 은행잔고나 탄탄한 직장, 또는 공부 잘하는 자녀나 잔병 없는 건강 같은 것에 우리의 소망을 두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길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외에 내가 품은 소망들은 무엇인지,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고 찾아내어 내어버리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엘리사마저 사라진 그런 절망의 순간이 이르기 전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먼저 하나님만을 오직 유일한 소망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 소망이 끊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께서 스스로 그들의 소망이 되어 주셨던 하늘아버지의 그 마음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향하시기만 한다면, 우리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하나님 외의 다른 일체의 소망들을 깨끗이 내어 버리길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직 하나님의 이 마음을 간곡하게 구하시길 바랍니다.
이 땅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과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인과법칙으로 설명되어지는 우리들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