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본문]
열왕기하 16장
1.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십칠년에 유다의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In the seventeenth year of Pekah son of Remaliah, Ahaz son of Jotham king of Judah began to reign.
2.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Ahaz was twenty years old when he became king, and he reigned in Jerusalem sixteen years. Unlike David his father, he did not do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his God.
3.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He walked in the ways of the kings of Israel and even sacrificed his son in the fire, following the detestable ways of the nations the LORD had driven out before the Israelites.
4.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He offered sacrifices and burned incense at the high places, on the hilltops and under every spreading tree.
[목요 새벽설교 최우윤 목사]
<아하스의 실패>
전문:왕하16:1~9
위기의 순간에서..
우리는 삶의 어떤 순간에서 삶이 어떤 이유에서건 안정적이지 못할 때에나 또 해를 두려워해야 하는 때가 오면 위기의 순간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즉, 이 위기라고 하는 위협적이거나 고통스러운 상태가 찾아오면 누구나 마음 가운데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찾아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르말랴의 아들 베가 제십칠년에 유다의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남유다에 아하스가 12대 왕으로 즉위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하스가 즉위하던 시기의 대외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앗수르는 남유다의 목을 죄여 오고, 북이스라엘과 다메섹은 쉬지 않고 위협을 해대는 위기의 상황에서, 아하스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지도 모르는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아하스는 이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에서 거침없이 앗수르와 손을 잡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하스가 앗수르와 손을 잡은 이유가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아하스가 앗수르와 손을 잡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아하스는 북이스라엘보다, 다메섹보다, 심지어 하나님보다 앗수르가 더 강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방 신들을 위해 분향하고, 심지어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인신제사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한 것은 이 이방 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하스와 같은 선택을 현대, 우리 시대의 용어로, ‘현실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없음을 ‘현실’이라는 말로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삶의 기준과, 우리 삶의 근간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어야 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구체적인 환경과 상황들 가운데 현실적인 선택에 빠지게 됩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손해와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유익을 얻기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우리는 매 순간 위기의 순간에서 ‘현실’이라는 이름의 몰록, 이방 신을 섬깁니다.
나와 나의 가족과 또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리고 오늘 아하스와 같이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절실한 상황일수록 더욱 더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지만, 우리는 아하스와 같이, 당장에 우리의 마음을 미혹케 하는 믿음 없는 길을 선택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아하스는 자신의 힘으로는, 또 남유다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앗수르를 대항할 수 없고, 또 심지어 북이스라엘과 다메섹으로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자신도 어쩔 줄 모르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하나님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앗수르의 왕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영혼을 맡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든 이 때, 우리는 원치 않는 위기의 상황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한순간에 뚫고 들어와 우리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듭니다. 에스겔서 22장 27절에 보시면, “그 가운데에 그 고관들은 음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영혼을 멸하고 있는 아하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남유다의 영혼을 팔아 지키고자 하는 이 아하스의 결국이 어떻게 되시는지를 보시겠습니다.
역대하 28장 20~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그에게 유익이 없었더라”.
디글랏 빌레셀은 자신의 신하이자 아들이라고 무릎을 꿇은 아하스를 구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대하 28장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그가 영혼을 판 앗수르 왕에게 뿐 만 아니라, 아하스는 그가 자신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까지 해서 섬긴 이방 신들에게서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이방 신들로 인하여 아하스와 남유다가 망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서 우리는 갈림길 위에 서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길이 단 하나 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어마어마한 상황에 눈이 멀고, 이성을 잃고, 겁을 먹어서 길이 아닌 길을 길이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43편의 기자는 패역한 세대 가운데 이렇게 간구합니다. 시편 43편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경건하지 아니한 세상 가운데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가운데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간구합니다.
나아가 시편 121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21편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는 어떠한 위기의 순간에서도 눈을 들어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을 버린 대가는 혹독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아하스가 앗수르 세력을 끌어들임으로 인해서 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리고 남유다는 조금 130년 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죄의 궁극적인 대가는 멸망,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의, 당장 죽을 것 같은 고난과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영원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이 새벽에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시편 109편 26절 말씀처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의 새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