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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최악의 왕 아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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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도톨 2020. 4. 3. 04:22

본문

[새벽설교 본문]

열왕기하 16장

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Then King Ahaz went to Damascus to meet Tiglath-Pileser king of Assyria. He saw an altar in Damascus and sent to Uriah the priest a sketch of the altar, with detailed plans for its construction.
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So Uriah the priest built an altar in accordance with all the plans that King Ahaz had sent from Damascus and finished it before King Ahaz returned.
12.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When the king came back from Damascus and saw the altar, he approached it and presented offerings on it.
13.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He offered up his burnt offering and grain offering, poured out his drink offering, and sprinkled the blood of his fellowship offerings on the altar.
14.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The bronze altar that stood before the LORD he brought from the front of the temple -- from between the new altar and the temple of the LORD -- and put it on the north side of the new altar.

[금요 새벽설교 정성엽 전도사]

<남유다 최악의 왕 아하스>

왕하16:10~20

오늘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BC732년경, 수백년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아람왕국이 앗수르제국에게 멸망당한 직후의 시점입니다.
당시 앗수르제국은 중동지역 거의 전체를 정복합니다.
중국 최초 통일국가인 진나라보다 500년 앞서서 앗수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일통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어 냅니다.

이제 남유다를 둘러싼 고대 중동지역은 앗수르라는 거대한 단일 국가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됩니다. 지난 수백년간 남유다가 경험해왔던 주변 세계가 모조리 부서지고 국가적 생존을 위한 전혀 새로운 환경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압, 암몬, 시돈, 블레셋,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람 등, 지난 수백년 동안 국경을 맞대고 숱한 전쟁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이웃 왕국들이 순식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한 사건은 남유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남유다는 사악한 아달랴 이후로 요아스 – 아마샤 – 웃시야 – 요담으로 이어지는 130여년간의 선한왕들이 펼쳤던 선정의 시대가 끝나고 아하스라는 최악의 왕이 등장합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앗수르 제국의 파괴적인 남하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가나안 인근 국가들은 아람왕국과 북이스라엘이 중심이 되어 반 앗수르 연맹을 결성합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반앗수르 연맹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7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아하스 왕을 폐하고 다브엘의 아들로 새로운 남유다의 왕을 세워 반앗수르 연맹에 동참시키려고 하였고 남유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남유다를 침략합니다.

그런데 남유다가 아람왕국에게 모질게 당했던 이유는 앞서 설명드린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과 병행기록인 역대하 28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는...”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막나간 왕이라 해도 무방할만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가 이렇게 패역했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성경은 당시의 긴박했던 국제정세로 인해 아람이 침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하스의 패역을 돌이키시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께서 당시의 국제정세와 아람왕국을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에게로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강력해보이는 신을 찾음으로 자신의 실패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 그리고 이사야서에 나타난 아하스 왕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그는 오히려 종교심, 경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 가지고는 자신과 유다민족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험난한 국제정세를 헤쳐나갈 수 없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아하스는 즉위하자마자 이방세계에서 영험하다고 이름난 온갖 우상들을 이스라엘에 들여옵니다.
심지어 자녀들을 불에 태워 우상에게 바치는 끔찍한 인신공양제사까지 드리는데 이는 종교적경건심이 지극한 민족들 가운데서나 나타나는 극단적인 제사방법이었습니다.

역대하 28장에 보면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였습니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불안감이 아하스를 자극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었던 초강대국 앗수르가 등장하였고, 앗수르의 위협에 아람은 국가의 생존을 걸고 남유다를 반앗수르 동맹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핍박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은 오히려 남유다를 궁지로 몰아갔던 막강했던 아람왕국이 섬기던 신들이라면 이 위기의 정국에서 나도 건져낼 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정복당한 아람왕국의 수도 다메섹을 방문하면서 그 곳에 있는 아람의 신전을 본떠서 예루살렘 성전을 리모델링합니다.

아하스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당시와 비교할 때 이미 그 구조와 웅장함에서 크게 퇴색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200여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애굽이나 블레셋, 아라비아, 북이스라엘 등의 주변국들에게 성전자체가 노략질을 당했던 적도 있었으며 아달랴 시대에는 바알을 숭배하는 장소도 성전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정황들을 감안해볼 때 아람신전을 모방하여 예루살렘성전의 리모델링을 명령하면서 아하스 왕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예배 방식을 세련되게 업그레이드 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여호와와 더불어 강력한 아람의 신을 함께 섬길 수 있는 효율적인 예배방식을 만들어냈다고 뿌듯해 했을 것입니다.

아하스의 강렬한 종교심에 관하여는 이사야 7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인해 두려워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갑니다. 10절에서 12절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곧 멸망할 것이니 걱정 말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줄 징조를 하나님께 구하라고 명령 하십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거부하는 이유가 제법 경건해 보입니다.
내 주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구원의 징조라 할지라도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라면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는 외적들로부터의 구원도 구하지 않겠다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경건함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아 보이는, 어떻게 보면 절대자 앞에선 극도의 겸양으로 비췰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사람과 하나님 모두를 괴롭히는 큰~ 일이라고 단호하게 책망하십니다.
13절,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라고 하신대로만 해야합니다.
구하라고 하셨으면 구하고 멈추라고 하셨으면 멈추는 것이 경건이지 자신의 얕은 도덕적 잣대 따위를 하나님 앞에 들이대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무서운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내 생각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따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의 제사인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초월적인 그 어떤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경외심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도취적인 종교심에 불과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는데 고페르 나무보다 더 귀한 백향목으로 방주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값비싼 마감재로 교회를 지어놓고 경건이라 생각하는 사람, 그리스도 안의 자유함이 아닌 자신의 수행과 고행을 통해 구원을 찾는 사람,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세워두신 그 자리가 아닌, 자신이 서고 싶은 자리에 서려고 애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모두 아하스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경외심을 표현하려는 형식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이 마음은 결국은 사람도 괴롭게 합니다.

아하스처럼 내 방식의 경건함을 추구할 때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은 사라지고 결국에는 자녀들을 헛된 우상 앞에서 불에 사르는 어처구니없는 거짓 경건의 참상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자신의 종교심에 도취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망령을 부리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하신 구원의 증거를 친히 드러내십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예수님의 수태를 예고하는 이 예언은, 바로 참담한 아하스의 죄악을 꾸짖으신 직후 선포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마음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잊으면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인간이 망가뜨리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런 사랑을 동일하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이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온라인 예배라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장르의 예배방식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께서 알아서 챙기십니다.
앞으로 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예배환경들에 대해 우려하는 대신에 이 새로운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어디에 있는지에 찾고 기도하는데 집중한다면 지난시간 우리가 본질 아닌 것, 하나님 아닌 것에게 빼앗겨 왔던 잘못된 형식들과 왜곡됐던 마음 자세들을 찾아내어서 예배의 본질 되신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더욱 정결하게 섬길 수 있는 예배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하스의 죄악의 면전에서, 아하스와 다윗 왕가를 넘어 인류 전체를 향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궁극의 사랑의 약속은 오늘,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이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배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자리라면 그 곳이 어디라도 거룩한 예배의 자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