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본문]
열왕기하 19장
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Then Isaiah son of Amoz sent a message to Hezekiah: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I have heard your prayer concerning Sennacherib king of Assyria.
2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This is the word that the LORD has spoken against him: "`The Virgin Daughter of Zion despises you and mocks you. The Daughter of Jerusalem tosses her head as you flee.
22.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Who is it you have insulted and blasphemed? Against whom have you raised your voice and lifted your eyes in pride? Against the Holy One of Israel!
23. 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By your messengers you have heaped insults on the Lord. And you have said, "With my many chariots I have ascended the heights of the mountains, the utmost heights of Lebanon. I have cut down its tallest cedars, the choicest of its pines. I have reached its remotest parts, the finest of its forests.
[화요 새벽설교 정성엽 전도사]
<산헤립과 히스기야>
오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부분은 앗수르 왕 산헤립의 교만과 그에 대한 심판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동쪽에서 새로이 급성장하고 있는 바벨론제국을 무찌른 앗수르는 남유다를 정복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킵니다.
최강의 힘과 모든 권세를 누리던 앗수르의 왕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입니다.
불과 50년 전쯤에 요나선지자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한복판에서 외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 앞에 왕부터 백성들이 모두 납작 엎드려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멸망을 면하였던 앗수르 제국은 그 이후로 당대의 대적들에 연전연승하며 모두 물리치고 중동의 지배자로 등극하면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이제 앗수르는 멸망의 목전에서 자비를 베푸셨던 하나님 앞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들을 죽죽 넘어버리는 지극히 교만한 지경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앗수르는 하나님을 대적했던 북이스라엘과 아람 등의 국가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어느덧 그 스스로가 높아져서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다윗의 후예, 남유다를 침략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요나선지자가 선포했던 임박한 심판 앞에서는 재를 뒤집어쓰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마음을 낮추었던 앗수르를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심판을 면케하여 주시고 그들을 인류역사 최초의 세계제국으로 높여주셨지만, 높임을 받은 후 그들은 곧장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고난을 주실 때 하나님 앞에 납짝 엎드리고 고난에서 풀려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패역의 쳇바퀴를 돌았던 히브리민족의 역사가 그들만의 유난한 반역의 패턴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앗수르 역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자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앉으려 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인류 최초의 범죄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만큼 높아지려는 탐욕. 아담과 하와로부터 이어진 우리의 죄성이 이끄는 바는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 궁극에는 하나님의 자리까지 탐하는 탐욕입니다.
시편 106편 46절에는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아담도, 이스라엘도, 앗수르도 걸려든 이 반역의 패턴에서 벗어나 낮은 자리로 눈을 향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일수록 하나님을 기억하고 스스로 낮출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은 29절부터 34절까지로 앗수르의 약탈과 포위 공격으로 인해 황폐화 된 남유다의 회복을 예언하시는 부분입니다.
삼년에 걸쳐서 남유다의 백성과 남유다의 땅이 완전하게 회복될 것임을 약속해주십니다. 그런데 그냥 곡식이 쭉쭉 자라게 해주시면 될텐데 왜 삼년이란 시간에 걸쳐 고생스럽게 회복을 시키시는걸까요?
이왕 회복시켜 주실 거, 왜 창조주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굳이 우리에게 고생의 시간과 노동의 시간과 결핍의 시간을 주시는걸까요?
신명기 8장에는 40년간의 광야생활의 이유를 하나님 앞에 낮아지게 하셔서 하나님을 섬기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마침내 복을 주려고 하심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드높은 창조주께서 범죄한 피조물의 스케일에 맞춰 주시다보니 나타나는 일종의 기현상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의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고 엄청난 삶의 업적을 이뤄낸 위대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할아버지로서 손주를 대할 때는 우쭈쭈 하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주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의 공감과 호응을 유도해낼 수 있는 수준의 유치함으로 내려가지 아기가 닿을 수 없는 높고 깊은 현학적인 가르침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 아기라도 감지해낼 수 원초적인 사랑을 담아 삶의 지혜로 가득한 주름진 얼굴을 개구지게 일그러뜨리십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수준으로까지 기꺼이 낮아져 주겠다는 마음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게 되면 상대의 자발적인 성장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게 됩니다. 달콤한 것으로 꼬셔보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사랑은 내 수준이 아닌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 자신을 떨어뜨리더라도 그와 소통하고 그와 함께 삶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낮아지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패역과 교만으로 죄의 진창에 처박힌 우리의 처지로 함께 낮아져 주셨습니다.
우리가 영으로 깨어나도록 이끌어 주시고 자극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때론 우리에게 고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도 허락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은 임마누엘, 곧 고난의 낮은 자리에, 고생의 진창 가운데로 친히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고생을 남김없이 다 함께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도무지 벗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는 늪 한가운데서 달랑 들어올리셔서 쓩하고 건져주시는 경우도 역사 속에서,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작은 일상 가운데서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동참, 자발적인 순종을 위해 우리와 함께 고생하시는 것을 마다치 않으셨습니다. 노예 감각에 쩌들어 있는 히브리 민족을 깨우시기 위해서 40년을 히브리 민족과 함께 광야를 떠도셨습니다.
흑암의 그늘에 주저앉아 있던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직접 인간의 육신을 입고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서 인간들이 인생을 살며 당할 수 있는 그 모든 괴로움들을 다 체휼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창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로 오셔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때로는 사나운 짐승이 뒤쫓게 하는 상황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뛰어다니게 하심으로 연약한 우리의 근육을 튼튼하게 성장시키십니다. 우리가 주의 손을 잡고 일어나되 우리의 다리에 스스로 힘을 주면서 함께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세워주시기 위해서 창조주 스케일에서 감내하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모든 낮고 작은 일들을 기꺼이 감내해 오셨습니다.
그냥 먹을 양식을 하늘에서 펄펄 내려주시면서 원하는 게 생길 때마다 다 주시면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편안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하신 계획에 우리의 소원을 자발적으로 합일시키는 데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함께 고생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수준에 보조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우리 수준까지 낮아져주시는 사랑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인류 전체의 역사를 멈추시기도 하시는 사랑이십니다.
오늘 힘들고 이해되지 않은 일을 당하신다면, 하나님의 마음에서 그 일을 살펴보시는 여유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길 바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해내기만 하면 피할 길을 알려주시고 뒤를 쫓는 사나운 짐승을 물리쳐주시는데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이 구원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세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2장에 걸쳐 설명한 앗수르의 거대한 위협이 허무하게 느껴지리만큼 신속하고 간단하게 제거됩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당시 남유다의 입장에서는 이번에 앗수르의 공격을 어찌어찌 물리친다 할지라도 강대국 앗수르의 공격은 끊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 도금을 다 벗겨서 바쳐도 아주 잠시 물러갔다가 다시 침략해 온 앗수르를 기억하는 히스기야왕과 남유다 백성들에게는 이번 공격을 막아낸다 할지라도 앗수르의 위협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위협, 당시 세계를 모두 정복한 호전적인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유다가 벗어날 길은 도무지 보이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교회도 얼마 전까지 이와 유사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재판에 이긴다 하더라도 고등법원가고 대법원가고...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이 끝이 보이겠는가?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았습니다.
승소하면 오히려 더 잔인하고 더 흉악하게 교회 앞에 더 추악한 것들을 걸어대니, 이 굴레의 끝은 도대체 어디인가, 답답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때, 하나님의 때가 임하자 그 모든 어둠의 그늘이 단번에 밝아졌던 체험을 우리 모두 누려보았습니다.
교회 앞 현수막이 걷힌 것이 이제 고작 4개월 남짓일 뿐인데도, 저만해도, 그 때의 흉험했던 감정들에 관한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합니다.
수 년 동안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분노나 위협에 관한 기억들은 이제는 어떻게 하면 영상광고를 잘 좀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공격적으로 전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임하기만 하면 그 즉시로 효력이 발생하는 결정문 같습니다.
우리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한 번에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지긋지긋한 늪 한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우리를 단번에 건져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삶 가운데서 경험을 해본 사람은 그 경험이 쌓일수록 삶의 위협 앞에 주눅드는 것이 아니라, 이 답답하고 모진 상황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실까 하는 기대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이런 의미에서 너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개인으로는 견딜 수 없을만한 큰 시련을, 우리가 함께하며, 견뎌본 이 믿음의 자산은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허락하신 가장 큰 선물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신속하고 뒤끝도 없는 그리고 우리 지각을 완전하게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열심, 창조주의 열심이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삶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열심히 이루시는 이 흥미진진한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기대로 우리의 마음 속 그늘이 완전하게 걷어지는 기쁨이 충만한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찬양이 우리 입과 마음을 오늘 하루 내내 맴도는 복된 하루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