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설교 본문]
베드로후서 3장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But do not forget this one thing, dear friends: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Bu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The heavens will disappear with a roar; the elements will be destroyed by fire, and the earth and everything in it will be laid bare.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Since everything will be destroyed in this way, what kind of people ought you to be? You ought to live holy and godly lives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as you look forward to the day of God and speed its coming. That day will bring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heavens by fire, and the elements will melt in the heat.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But in keeping with his promis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home of righteousness.
[수요 새벽설교 정성엽 전도사]
<하나님의 시간>
오늘 본문의 시대배경은 예수님의 1대 제자들이 활약하던 사도의 시대가 저물고, 그 분들의 제자들이 교회를 이끌게 되는 일명 속사도시대가 열리던 시점입니다. 그런데 당시 성도들 가운데는 이 세상이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존속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고, 지금은 구호처럼 외치는 마라나타가 당시에는 당장 오늘이라도 이루어 질 수 있는 당면한 현실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10년이 지나고 20년, 30년이 지났는데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자, 이를 가지고 조롱하는 무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 현상을 자기 입맛에 맞게 설명하려는 이단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금방 오실 것이라고 믿고 있던 성도들 사이에서도 의심과 불신이 돌기 시작합니다.
온갖 신들이 숭배 받던 로마에서 다른 신들을 모두 우상으로 여기고, 로마사회의 근간인 계급질서를 부정하면서, 주인과 노예가 형제로 소통하고,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인격체로 서로를 존중했던 기독교의 새로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가족과 친인척들, 그리고 생업을 함께 하는 동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갖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베드로후서가 쓰여질 무렵에는, 사회적 배척이나 불이익 수준을 넘어서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의 핍박이 시작되고 있던터라, 성도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이 왜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먼저 베드로는 인간의 시간개념과 하나님의 시간개념은 아예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시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자체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사고할 수밖에 없는, 존재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루”라는 같은 단어도, 하나님의 하루와 우리의 하루는, 전혀 다른 단위가 됩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어떻게 거슬러 볼 도리조차 없는 불가항력의 물리적 단위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 분의 숭고하신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 만들어내셔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뿐인 것입니다.
일전에 담임목사님께서도 크로노스적 시간과 카이로스적 시간을 설명하신 적이 있으신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역사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육의 영역에 속한 우리는 크로노스적 시간에 따라 살 수밖에 없지만, 영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 하나님의 의미 단위로써의, 카이로스적 시간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말이 좀 어려운데요, 사실 이해하기 쉬운 개념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초월적 영역,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으로 접근할 때는 지적인 이해 방식으로 시작해서는 안 되며,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 지성 가지고는 하나님 차원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광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속성은 이것이다” 하고 단정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하나님을 간명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단면만을 가지고 자신들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는 언제나, 인간의 지각으로는 반대어에 해당되는 양 극의 속성이 함께, 그리고 동시에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긍휼과 공의라는 두 단어는, 그 원래의 의미가 손상되지 않는 한, 하나의 인격 안에 동시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긍휼이란,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인 반면에, 공의는, 지은 죄에 합당한 정확한 수준의 벌을 주는 것입니다.
마음 내킨다고 긍휼을 베풀면 이미 공의가 무너진 것이며, 반대로, 공의에 따라 정확한 분량의 벌을 주면 그것은 이미 긍휼이 아닙니다.
긍휼과 공의는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는 대립된 속성을 가졌지만, 기이하게도, 하나님 안에서는 공의와 긍휼이 그 본래의 속성을 철저하게 유지하면서도, 신비롭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더 큰 선으로 합일합니다. 그리고 그 선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긍휼과 공의가 하나님 안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룬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인들을 향한 더할 수 없는 긍휼의 마음이, 피와 죽음으로 죄의 댓가를 치르시는 공의의 집행과, 하나님 안에서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궁극의 사랑으로 합일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창조주의 자기희생이 역설을 초극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이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뤄지는 이런 신비롭고 역설적인 조화와 균형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지각을 훌쩍 넘어가 버리는 영역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하나님의 속성 중 어떤 하나의 속성만을 택하거나 강조하여 인간 수준에서도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쪼그라든 하나님 상을 만들어 냅니다.
긍휼의 하나님이 어찌 영원한 지옥같은 걸 만드셨겠냐.
죄인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그저 소멸되지, 영원한 형벌이 이어지는 지옥 같은 건 없다.
사람들이 공감하기 편안한 긍휼의 측면만을 강조한 이 교리는, 전 세계에서 2천만명의 신도를 확보하고 수많은 학교와 요양원을 세운 제7일 안식교의 기본 교리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엄격하셔서 극소수의 성도들만 구원하신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공의만을 강조하여 신도들의 공포감을 극대화 시켜 복종하게 만드는, 우리가 잘 아는 이단도 있습니다. 14만4천명 차면 천국문 닫히니까 교주님 말 잘 따라서 그 숫자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충성해야해. 신천지 신도들의 지독한 복종심의 근원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만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공포감을 조장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 속성만 강조되어 하나님의 영역 전체가 조화롭게 존중되지 못하면 엉터리 하나님 상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설명되는 하나님은 이해하기는 쉽지만, 만유를 아우를 수 없는 편협한 하나님이 됩니다.
정통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을 인간수준으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어거스틴과 같은 위대한 신학자조차도 하나님의 영역에 대해서는 먼저 믿음으로 반응하셨지, 지적 영역에서 설명하는 데는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시간’처럼 신비의 영역에 해당하는 차원을 우리 현실 가운데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 영역을 만났을 때는, 크로노스건 카이로스건, 이런 지적 접근이 아니라, 먼저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때 우리의 믿음은 세 가지 차원을 동시에 아울러야 하는데요, 첫째로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조차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깊으신 목적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하신 사랑이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과 선하신 사랑이 향하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 차원의 믿음으로 시간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에게는 우리의 지각을 통한 이해의 정도와는 무관하게 먼저 초월적 영역으로부터 주어지는 평안부터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촉박하고 부족해 보이는 시간의 압박 가운데서도, 알 수 없는 평안이 임하여, 그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해낼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멈춰진 듯한, 무력하고 답답한 시간에 처해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간은, 하루 24시간의 동일한 물리적인 단위로 흘러가지만, 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24시간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장대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생의 모든 순간순간들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알차고 의미 있는 순간들로 채워져서, 이 땅에서 주어진 평생의 시간들을 마치 하루를 지낸 듯 콤팩트하게 살아낼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의 지각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 처했을 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주권과 그 분의 완전하신 선하심과 나를 향하신 끝모를 사랑을 믿음으로 아멘하게 될 때, 피조물 수준의 얕았던 이해가 창조주 차원의 신비의 영역으로 확장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 믿음의 눈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간을 다시 감각해보라고 요구합니다.
이 관점으로 바라볼 때 육적인 감각으로는 더디게 오는 듯한 약속의 성취가,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이 천하 만물과 모든 족속과 백성들 가운데 곳곳이 스며들기 위해 필요했던 새 창조의 순간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죽어있던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를 경험하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을 기회를 충분히 얻게 되도록 오래오래 참고 기다려 주시는 깊은 사랑입니다.
육신의 감각으로는 너무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시간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사랑의 역사를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간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이런 하나님의 시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전제를 둔 다음에, 그러나 재림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강림하시는데, 도둑같이 순식간에 임할 것이고,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만큼 강렬한 징조들과 함께 임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텐데, 이 약속을 믿고 사는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 거룩하고 경건하게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마땅한 것 아닌지 반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 약속을 믿고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날을 고대하는 마음이란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날은, 이 세상 전체가 원자단위로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참혹한 멸망이 임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재림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의로움으로 가득 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받는 소망의 날입니다.
우리는 의로만 가득한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에 임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곳일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의로 가득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시당하고, 아버지의 이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 땅의 현실에 분노한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불경함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의로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과연 어떤 곳일까 소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참혹한 멸망이 피할 길 없는 수순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멸망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날에 도래할 의로움이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의 소망으로 바라보며, 경건과 거룩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베드로 사도님은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먼저 의심하고, 조사하고, 분석해서 이해가 되고 납득이 가면 그 다음에 믿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렇게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에 앞서, 믿음이 먼저입니다. 이해 안 되고, 납득되지도 않지만, 일단 믿고 순종하다 보면 “아! 이 상황이 바로 그 말씀이었구나!” 비로소 깨달음이 주어지는 체험적인 앎이 성경이 가르치는 지식습득의 순서입니다.
베드로 사도님이 ‘우리’라고 호칭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을, 일단 먼저 믿고 보는, 세상 관점에서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바보들인 것입니다. 이런 바보들을 2천년전 로마시대 대중들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무리들, 곧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너무 똑똑해져서 이런 바보가 되기를 원치 않는 자칭 기독교인들을, 이 시대의 대중들은 개독교인이라고 조롱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영역을 믿음으로 추구하는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베드로 사도님과 같은 분들이 ‘우리’라고 인정하는 무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순종으로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넓고 깊은 세계를 함께 맛보며, 이 땅에서 주어진 우리 인생의 시간을 함께 나누면서 걸어가는 우리 두레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이 녹아내리는 참담한 멸망의 순간에도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받을 믿음의 소망이 공급해주는 기쁨과 감사가 끊이지 않고 충전되는, 축복된 하루 하루들이 일상이 되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 힘차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